종이가 없던 옛날 사람들은 배변을 본 후 어떻게 처리했을까?
아마도 손으로 닦고 나중에 씻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된 것은 2 세기 초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은 4 5 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8세기에는 양질의 종이가 만들어지고 12 세기 말에는 재생지도 만들어졌는데, 14 세까지는 귀중품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종이로 뒤처리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코를 풀거나 밑을 닦는 종이가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근대에 들어오고 부터이다. 그러면 그 때까지 사람들은 용변 후 어떻게 뒤처리를 했을까 ?   중동이나 남아시아에서는 왼손으로 닦아내고 물로 씻는 방법이 널리 행해졌다. 그래서 왼손은 부정하다 하여 식사 때는 오른손만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최근까지 나뭇조각을 만들어두고 거듭해서 사용했는데, 이와 비슷한 것이 그리스나 일본에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야외에서는 일을 마치고 돌이나 풀잎 혹은 식물의 줄기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본 9 - 10 세기 귀족들의 주택양식에는 변소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변기 ( 요강 ) 에 용변을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 · 한국에서도 예부터 변기를 실내에 들여놓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파리의 거리에 공중변소가 생긴 것은 1800 년 무렵부터이다. 그러면 당시까지 설사기미가 있던 귀부인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급히 일을 보고자 했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
인적이 드문 장소로 달려가 적당히 처리했다 .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의 선물로 유럽에 가져온 가장 큰 선물은 매독이었다. 원래 서인도제도의 풍토병이었던 이 병이 한번 문명사회에 발을 들여놓자 거침없이 활개를 펴고 인류를 공격했다. 매독의 유행과 함께 일어난 두드러진 현상은 공중목욕탕의 쇠퇴. 사람들은 당연히 비위생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특별히 가정에 목욕탕을 지을 여유가 없는 서민들뿐만이 아니라 「짐은 곧 국가다」 는 말로 유명한 루이 14 세도 1 년에 한번밖에 몸을 씻지 않아 몸에는 이가 득실거렸다고 한다.
당시의 가정에는 화장실이 없는 대신 항아리가 하나씩 있어 그 속에 일 처리를 하고 창밖에 쏟아붓곤 했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남성이 여성을 에스코트할 때는 보도의 안쪽을 걷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때 「봉변」을 대신 맞이주기 위한 신사도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남자건 여자건 거리에서 볼일을 보고 싶으면 한적한 곳에 가서 적당히 처리했기 때문에 온 도시가 악취로 들끓었다. 그래서 당국은 대로변이나 특별히 청결이 필요한 곳에 「대소변금지」라는 랫말을 박아 두어 자제를 촉구했다. 이 말뚝을 불어로 「에티켓」이라 했고, 오늘날 그것이 변해 「예의 · 범절」이라는 뜻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