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공존과 자유를 그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모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만약을 위해 세계화의 또 다른 모델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18세기 김홍도라는 한 사람의 비범한 화가를 만나게 된다. 그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의식세계에서 이룩된 세계화를 경험하고 그 시대의 영광과 풍요,행복과 꿈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사람이었다.
김홍도는 1745년 서울의 평범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 ’로 주위의 관심을 모으다가 7세 전후에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출입하면서 조기 교육을 받았다. 20세 이전에 도화서의 화원(畵員)으로 발탁되어 21세 때부터는 ‘경현당수작도 ’같은 중 요한 행사 그림을 그렸다.이후 김홍도는 잠시 안기 찰방,연풍 현감 등 외직을 역임하기 도 했지만 주로 화원으로 재직하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김홍도의 화원 시대는 정조라는 불세출의 성왕이 재위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에 온 힘 을 쏟았던 시대였다.이앙법의 보급으로 농민들은
부유해졌고 신해통공으로 시장이 번영했 으며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신분질서는 이완되고 새 시대의 꿈을 품은 밝은 예술들이 자라났다.그 자신 탁월한 서예가요,화가였던 정조는 일찍부터 김홍도의 천재를 알아보았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초상을 그렸는데,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하는 기록이 ‘홍재전서 ’에 있을 정도로 정조의 관심은 각별했다. 이 시대의 합리성은 김홍도가 두각을 나타내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김홍도는 오랫동안 집안의 세업(世業)으로 그림에 종사해온 기득권 화원 가문 출신이 아니다.
스승 강세황은 제자보다도 더 늦게 벼슬에 나갈 만큼 주변머리가 없어 변변한 연줄이 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도는 금방 인정을 받고 화원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오른다.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사였다.말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역과 연고에 따라 사람을 발탁하는 오늘날의 촌스러움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원이란 기본적으로 궁중에 필요한 장식용,기록용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를 말한다. 문과 벽을 장식하는 도상(圖像)과 신선 그림,십장생(十長生)그림,병영지도,행사장 그림,관용 허드레병풍 등이 모두 화원의 소관이다.
김홍도 만한 천재가 매일 이런 판박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끔찍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은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직업을 ‘밥벌이 ’라고 말하며 한숨 쉬는 오늘날의 관점일 뿐이다. 김홍도에게 직업적 삶과 예술가적 삶 사이의 부조화는 없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그의 천재적인 개성은 개인 창작을 넘어 정조의 어명 을 받아 그린 용주사의 탱화들,각종 궁중장식용 병풍 그림과 서적의 조그만 삽화 등에도 역력히 나타난다. 비록 ‘환쟁이 ’라고 천시받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모든 주문받은 그림을,찢어진 문풍지를 때울 만큼 하찮은 소품까지도 진심으로 즐기면서 그렸다.
자신의 시대를 사랑할 수 있었던 화가의 이 열렬한 충족감 속에서는 지위라든가 돈, 명성과 같은 세속적인 보상들은 무의미했다. 오직 그림에 조용한 정열을 쏟으며 살아갈수 있는 생활 자체가 기쁨이었다. 이러한 기쁨은 조선의 좁은 울타리에 갇힌 유아적인 자(自)문화 중심주의가 아니었다. 흔히 영 ·정조 시대는 조선중화사상의 자주적인 의식세계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로 표출 된 가장 조선적인 문화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화와는 거리가 먼,쇄국적 자아도취의 시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 시대는 대륙(청)으로의 연행 무역과 해양(일본)으로의 통신사 무역이 활발했던 경제 교류,문화 교류의 세기였다. 그러면서도 조선은 어떤 문화의 주변부가 아니라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작은 중심 으로 우뚝 서 있었다. 김홍도는 1789년을 전후하여 동지사(冬至使)이성원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하고 또 쓰 시마로 건너가 지도를 그려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1795 년 이후 김홍도 그림에 나타나는 변화들은 이처럼 세계를 배우고 온 예술적 안목의 성숙을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당시의 수준에서는 가장 세계적인 자극과 영향 아래 가장 조선적인 맛이 나는 우리의 화법으로 우리 경치를 그리는 김홍도의 예술 이 나타났던 것이다. 김홍도의 시대,중국의 청은 확고한 패권 국가로서 경제적 부와 물리력으로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그러나 조선왕조도,일본의 에도 막부도 청을 ‘글로벌 스탠더드 ’로,하나의 ‘보편 ’으로 전제하지는 않았다.
교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의 생활권역을 유지하면서 각각 그 지역과 환경에 알맞은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노력했다.이 시기의 세계화는 다양성 속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화였다. 정조가 죽은 뒤 김홍도는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며 불우한 노년을 보낸다.성근 가지 삐쭉삐쭉하고 서리에 마른 뿌리가 드러난 숲을 그린 그의 노년작 ‘소림야수도 ’는 보는 이의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그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황량한 가을의 풍경은 화가 자신의 슬픔과 함께 한 시대의 조락(凋落)을 표상하고 있다.한 ·중 ·일 3국의 동북아시아가 가장 조화롭게 공존했던 세계화 시대가 저물면서, ‘왕조의 몰락과 근대화 ’라는 보다 야만적인 세계화가 시작되고 있었다.-조선일보.2001.1.31.21.